화학공학소재연구정보센터
학회 한국공업화학회
학술대회 2013년 가을 (10/30 ~ 11/01, 대전컨벤션센터)
권호 17권 2호
발표분야 특별강연
제목 항상 꿈을 가지고 도전합시다
초록 한국의 과학발전을 위해 정진하시는 과학자 여러분 앞에서  
강연할 기회를 갖게 되어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바쁘신 시간을 내서 이렇게 참석하여 주신 여러분께 도움이  
될 만한 말이 무엇일까 하고 며칠 간을 고심하다가 내린   결론은, 내가 가장 잘 아는 저의 살아온 얘기를 간략하게  
말씀 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1962년 공대 화공과 대학원을 졸업하고, 처음 들어간 직장이 한국 생산성 본부의 기술부장이었습니다. 월급이 일반 직장의 동료들의 7배 수준인 관리직이었으니, 20대였던     저에게는 과분한 자리였죠.
  
하지만 업무 범위가 너무 광범위하고 모호한데다, 밤낮    회전의자에 앉아 있으니 나태해지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회의를 느끼게 되어, 6개월 만에 회사를 사직하였습니다.  

다시 한국사진필름의 공장장으로 자리를 옮겨 인화지    기술을 개발하는 등 업무에 흥미를 되찾았는데, 회사가     다른 사람에게 넘어가 다른 일을 찾아야 했습니다.  

부장, 공장장을 했던 사람이 큰 회사의 말단 사원부터 시작하기에는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고민 끝에 저는 새로운 도전을 택해, 1965년(28세 때) 서울 마포구 연남동 AID 주택 연탄광에 실험실을 차리고 PS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자본 투자가 적게 드는 SUSPENSION 중합법을     사용하여 폴리스타이렌 생산을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1968년 정부의 ‘합성수지 국산화 방안’이 발표되고, 대기업인 한남화학이 대규모   공장을 건설하게 되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PS에 대한 특별관세가 폐지되어 PS가격은   급락하였는데, PS 원료인 스타이렌 MONOMER의 관세는   그대로 유지되어 소규모 생산으로는 도저히 경쟁을 할 수가 없어 PS사업을 접게 되었습니다.  
  
부모님한테 받은 땅을 팔아 공장시설에 투자하고 운영   자금으로 썼으나 모두 잃고 무일푼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 제가 정부 정책의 방향이나 사업적 위험성에 대해    사전에 충분히 알아 보았  더라면 피할 수 있었던 실패였습니다.  
그때 저는 기술이 만능이 아니라 세상 돌아가는 것도 늘 주시하여야 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제가 1차 도전에 실패하고 좌절하여 주저 앉았더라면,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 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저는 제2차      도전으로 지금의  성공 기반이 된 BLOWING AGENT 사업을 시작하였습니다.  
발포제 생산시 나오는 암모니아 가스, 중크롬산 폐수 등으로 인하여 1968 -> 1975년 사이, 연남동 -> 불암동 -> 시흥 -> 길동으로 8년 동안 4번이나 공장을 옮겨 다니며 5~10TON의 반응기와 설비를 2년마다 해체하고 조립하기를 반복하였는데, 어떻게 가능했는지 저도 의문이 갑니다.
  
   오직 오뚜기처럼 일어서는 집요한 도전 정신이 없었다면  중도 포기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1975년 마침내 인천 주안에 4,300평의 땅을 분양 받아  [동진화학 공업사]라는 자기 공장을 갖게 되었고, 저는     공장장, 생산부장, 영업부장, 사장을 겸직하고 무엇이든     해야 하는 만물박사가 되었습니다. 사업도 어느 정도       순조롭게 자리잡아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1978년 12월, IRAN의 ‘호메이니 혁명’으로 인하여  2차 OIL SHOCK가 발생하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친미    정권이었던 팔레비 왕정이 무너지자 혁명정부는 미국과    국교단절 및 석유수출 금지 조치를 취하였습니다.
  
이란은 원유 매장량 세계 3위, 생산량 세계 5위, 천연가스는 매장량, 생산량 세계 2위인 에너지 강국입니다. 이러한  이란이 금수조치를 하니, 원유는 U$10/BRL -> U$40/BRL,  물가는 25% 폭등, 당시 고도 성장을 매년 기록하던 우리나라 경제 성장율은 전년도 9.3%에서 6.8%로 떨어지더니, 1980년 -1.2%로 급락하였습니다.

그 당시 잘 나가던 저희 회사 거래처들, 예를 들면 서울  근교에 있던 대동화학, 부산의 국제상사, 삼화고무, 진양,   태화 등 유수의  많은 기업이 도산하면서, 그 여파가 저희   회사에도 몰려들기 시작  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1980년 8월 24일 저녁 치명적인 사고가  발생하였습니다. 당사의 수출품인 고무 발포제 DPT를      선적하려던 부산항 제1부두에서 대형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밤중에도 대낮처럼 환하고 수 많은 소방차가 출동해       대혼란이 있었다고, 다음날 아침 부산 사무소의 보고가     왔습니다.  

사실 고무 발포제를 실은 CONTAINER가 일주일 전쯤,     공장을 떠나 부산 CONTAINER YARD에 입고를 해서, 부산항 제1부두의 화재가 저희 회사제품과 연관된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화재 바로 다음날 부산 항만청에서 사고에 대한    행정명령이 저희 회사에 떨어졌습니다.  
첫째, 모든 선박은 발포제의 선적을 중단하라.  
둘째, 사고의 원인이 밝혀지고, 그 원인에 대한 안전대책이  
세워진 후 전적을 재개한다는 내용이었습니다.  

문제는 고무용 발포제는 화재의 위험성이 있지만, 다른   합성수지의 발포제는 전혀 위험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발포제의 선적이 금지된 것이었습니다.  
  매출 50%가 수출이던 당사에게는 해일과 같은 액운이었고, 이 당시의 OIL SHOCK로 국내 거래선이 연쇄 부도를 맞는  삼각파도의 깊은 골로 빨려 들어가고 말았습니다.  
  
수출이 중단되어 자금회전에 치명타를 받았고, 해외 고객이 다른 경쟁사로 옮겨가는 상황이 약 3개월 반 지속되면서,   사채까지 빌려 가며 부도를 막으려고 몸부림치다 결국     최후를 맞은 것이었습니다.  

남들이 사업을 하다 부도 내고 망했다는 말은 많이 들어  보았지만, 이제 정작 내가 그 사람이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고, 당장 내일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고 무엇이 일어날지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냥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고, 자금에 숨통을 다소 열어 준다면, 회사를 회생시킬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이런 취지의 회생방안을 갖춰, 수원지방 법원 인천지청에 법정관리 신청을 하였더니, 3개월여의 심사 끝에 1980년   12월 9일 인천 지방법원으로부터 법정관리를 승인하는    ‘보전처분’을 받게 되었습니다.  

법정관리가 받아 들여지니, 채권자들의 채권행사가 동결  되었고, 이제 숨을 쉴 여유를 찾게 되었습니다. 천만다행   이었던 것은 그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직원들의 동요가     없었던 점, 거래처를 직접 찾아가 사실대로 솔직하게 설명을 하고, 수금만은 현금조건으로 하여 그 이자만큼 가격을 깎아 주었더니, 생각했던 것 같이 현금이 딱 막히지는 않았습니다.  

가장 큰 문제는 실추된 회사의 신용을 어떻게 회복할    수 있는가 였습니다.  
떠나버린 해외 BUYER들을 전부 다 우리 고객으로 되돌리는 것은  만만치 않았습니다.  
저는 회사 관리는 법정관리인에게 맡기고 해외 각지의   고객을 다시 모셔오기 위해 해외 출장에 저의 모든 시간을 쏟아 부었습니다.  

어떤 때는 대만부터 시작해서 20여개 국을 35일간 서쪽   코스로 돌기도 하고, 또 반대로 돌기도 하였고, 어떤 때는  호주.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싱가폴. 태국. 필리핀. 대만.  일본등 남북으로 돌기도 했습니다.  
모든 여행은 혼자 하였고, 어떤 때는 과로로 인한 감기 몸살을 앓기도 하고, 손바닥에 붉은 반점이 생길 정도로 피로가 쌓여 일정을 쉬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지구를 몇바퀴  돌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몇 년 하였더니, 떠났던 고객들이 돌아오기 시작  했고, 현재는 전세계 80여개 국에서 당사 발포제가 표준   제품이 되어 팔리고 있습니다.  

1989년 5월, 법정관리를 조기 해제시키고, 회사는 완전히 정상화 되었습니다.  
그 후 사업은 승승장구하여 반도체 및 디스플레이용     전자재료로 사업을 확장하여 현재는 회사 매출의 80%이상을 첨단 전자재료  분야에서 일으키고 있습니다.  

현재 저희 회사는 한국에 6개, 중국에 7개, 인도네시아 1개, 대만 1개 등 총 15개 공장에서 2012년 6,600억의 매출을   올리고 있는 회사로 성장하였습니다.  

저는 올해 76세입니다. 금년에도 저는 꿈을 가지고      한국 과학기술단체 총연합회(한국과총) 회장 선거에 도전하여, 치열한 선거전에서 승리하였습니다.  

저에게는 대한민국의 과학기술 발전과 과학기술인의     사회적  위상 제고라는 꿈이 있습니다.  
제가 만일 성공한 사람이라고 한다면, 사업이 잘되서     성공한 것이 아니라, 아직도 꿈을 가지고 끊임없이 집요하게 도전하고 있기 때문에 성공한 사람일 것입니다.  

저는 이 꿈과 도전을 여러분과 함께 나누고자 이 자리에 서 있습니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고 얘기합니다.  
근면, 성실, 열정, 인맥, 행운! 여러분이 성공의 조건으로  이미 알고 계시는 것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포기할 줄 모르는  
집요한 도전입니다.  

여러분! 큰 꿈을 꾸시고 절대 도전을 멈추지 마십시오.  

앞으로 10년, 20년 후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성공해     있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저자 이부섭
소속 (주)동진쎄미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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